1. 도화지, 그리고 순수
여기 하얀 도화지가 있다. 소유자는 이 도화지가 너무 소중했다. 그는 도화지의 하얀 색이 변하지 않도록 금빛 케이스에 넣어두고 이따금 열어서 눈으로 보기만 할 뿐, 도화지에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다. 케이스에서 도화지를 열어 보던 어느 날, 그는 창밖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새로운 도화지를 발견한다.
그 도화지에는 풍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풍경화는 유럽의 화려한 도시를 묘사하고 있었다. 그림 우측 귀퉁이에 그려진 커다란 교회 옆에 프랑스 국기가 그려진 걸 보니 아마도 프랑스의 어느 소도시 같았다. 자신이 동경하고 있던 낭만의 국가 프랑스에 대해 그려진 그 도화지가 마음에 들었다. 풍경화가 그려진 도화지는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쳤다. 그는 이 도화지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풍경화가 그려진 도화지를 잡으려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자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풍경화가 그려진 도화지가 바람에 날아갔다. 그는 문득 이 풍경화가 그려진 도화지를 이번에 잡지 못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급해진 그는 얼른 집 밖으로 나가서 풍경화가 그려진 도화지가 날아간 방향으로 달려가 도화지를 쫓았다.
도화지는 마치 살아있는 듯 바람을 타고 그를 피해 다녔다. 가끔 그에게 다가왔다가 멀어지기도 했는데, 짖궂은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도화지의 움직임이 그의 모든 신경과 관심이 풍경화가 그려진 도화지를 향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 도화지를 갖기 위해 비가 오는 날도,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도 아랑곳하지 않고 쫓아다녔다.
풍경화가 그려진 도화지를 잡으려 수일을 쫓아다닌 결과, 드디어 그 도화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자신이 동경하는 프랑스의 그림이 그려진 도화지를 손에 들고 보니 아주 마음에 들었다. 원하던 것이 내 것이 된 순간이었다. 그는 풍경화가 그려진 도화지가 손에 들어오자 금빛 케이스에 보관 중인 자신의 하얀 도화지가 생각났다. 창 밖에 있던 풍경화가 그려진 도화지를 정신없이 쫓아다니느라 금빛 케이스를 닫지도 않았다는 것도 떠올랐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풍경화가 그려진 도화지를 돌돌 말아 손에 쥐고는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도착해보니 역시 금빛 케이스는 열려 있었다.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하얀 도화지는 풍경화가 그려진 도화지를 잡기 위해 열어 두었던 창문으로 들이친 비에 젖은 자국이 여러 군데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분노했다. 분노의 대상은 자신이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도화지를 보호했던 것이 하루 아침에 허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에게 하얀 도화지는 더 이상 하얀 도화지가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분노에 정신없던 찰나,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풍경화가 자신의 분노로 구겨진 것을 발견했다.
다시 한번 크게 놀란 그는 자신의 책상에 도화지를 펼쳐서 구겨진 부분을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화지는 두께가 있었고, 여타 두꺼운 종이들이 그렇듯 한 번 구겨진 도화지는 그 자국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는 좌절했다. 자신의 욕심때문에 하얀 도화지를 잃었고, 동경하던 국가의 풍경화가 그려진 도화지를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게 풍경화가 그려진 도화지도 더 이상 자신이 처음 만났던 그 당시의 풍경화가 그려진 도화지가 아니었다.
하얀 도화지와 풍경화가 그려진 도화지, 둘은 각각 다른 의미의 순수를 상징한다. 하얀 도화지는 말 그대로 순백의 순수, 그 어떤 것에도 쉽게 물들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풍경화가 그려진 도화지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이미 어떤 것으로 채워져 있으나, 채워진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
우리가 ‘순수’를 말할 때 우리는 보편적으로 깨끗함, 투명함과 같은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함, 또는 이미 너무 아름다워서 보는 이의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순수함. 만약 이 둘이 앞선 도화지들처럼 비에 젖어 물들어버리고, 구겨져 원래의 아름다움을 잃는다면, 그들은 ‘순수’를 잃어버린 것일까? 그렇게 쉽게 잃어버리는 것이 ‘순수’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 가치를 보존할 수 있을까?
2. 이디스 워튼이 말하는 순수
‘아! 안 된다. 메이가 저런 종류의 순수에 빠지면 안 된다.
상상력과 경험을 꽁꽁 봉해버린 마음속에 또아리 튼 저 순수!’
(제16장中)
‘이 견고하면서도 해맑은 맹목성 덕분에 그녀의 코앞의 세계는 늘 변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제34장中)
이디스 워튼은 순수함을 통해 당시 뉴욕 사교계를 비판했다. 그래서 그녀가 사용한 순수함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맑고 깨끗함 대신 맹목적이고, 수동적이다.
이 책에서 순수를 대표하는 사람은 ‘메이 월랜드’이다. 작가는 메이 월랜드의 성격, 어법, 행동을 통해 순수함이 가지고 있는 맹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흰 색이다. 그녀에 대한 묘사에서 하얀 색은 자주 등장한다. 하얀 피부, 투명한 눈, 하얀 드레스와 같이 외형에 대한 묘사에도 하얀 색이 자주 사용된다. 뉴랜드 아처가 그녀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에서도 빛이 난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그녀를 여신으로 묘사하기까지 하는데, 사냥의 여신 다이애나와 같았다는 말이 작품에서 무려 네 번이나 사용된다. 이처럼 작가는 메이 월랜드에 대한 묘사에 빛, 흰 색, 여신과 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녀를 작품 내에서 순수하고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
메이 월랜드는 풍기는 분위기만큼 행동과 생각도 고상하다. 전반적인 행동은 차분하고, 진중하다. 뉴랜드 아처를 바라볼 때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그의 입장에서 마음이 편할 수 있도록 행동한다. 뉴랜드 아처 앞에선 다른 이들 앞에선 보이지 않는 애교도 보인다. 만약 뉴랜드 아처에게 다른 여성이 생긴다면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서라도 양보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야말로 그 시대 양처(良妻)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착하고, 순진할 것만 같은 메이 월랜드는 그녀의 사촌 언니 엘렌 올렌스카 백작 부인과 교류한 뒤, 엘렌에 대해서는 점점 냉혹한 사람이 된다. 처음 그녀를 만날 때만 해도 같은 따뜻하게 대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처에게도 그녀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엘렌에 대한 태도는 차갑게 변한다. 처음엔 동정과 연민, 가족이라는 유대감을 가지고 엘렌을 대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소와 경멸의 감정으로 그녀를 대한다. 작품 후반부 엘렌이 뉴욕을 떠날 때, 가장 적극적으로 엘렌이 떠나도록 만든 것이 메이 월랜드였다.
메이의 집안은 뉴욕 사교계를 드나들 수 있는 상류층 집안이었다. 그녀는 뉴욕 사교계를 드나들면서 점차 당시 뉴욕 사교계가 가지고 있던 수많은 관습에 자연스럽게 물든다. 집안에서도 관습을 중요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쉽게 거기에 물들었다. 마치 하얀 도화지에 물감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처럼 관습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어릴 적부터 배워 온 예의범절이 몸에 밴 그녀가 사교계의 관습을 온전히 받아들이자 그녀는 금새 사교계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사교계에 존재하는 관습에 물든 이후 그녀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았다.
메이가 아처를 대하는 태도는 작품 초반과 후반에 차이가 있다. 작품 초반에는 약혼자 하나만 바라보는 여성이었다. 아처가 바라보기만 해도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고,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움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서 메이는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다. 주변 환경도 자신이 원하는데로 바꾸려고 한다.
그렇다고해서 그녀가 아처에게 가졌던 순수한 감정이 없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처의 앞에선 시종일관 순종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 순종적인 모습이 아처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적도 있었으나,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메이 월랜드가 아처에겐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 후반에 메이가 죽고난 후 아처와 그의 아들 댈러스가 나눈 대화를 통해 이를 엿볼 수 있다. 댈러스는 메이 월랜드가 죽기 전 날 ‘아버지는 어머니의 청에 따라 가장 원하던 것을 포기하신 분이니까’ 라고 자신에게 말했던 것을 아처에게 전달해준다. 메이는 아처가 엘렌에게 연모의 감정을 가졌던 것도 알고 있었으나, 모른 채 했었던 것이다. 메이 월랜드의 이런 행동들을 통해 우리는 그녀가 가졌던 아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진정 순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이가 시간이 흐르며 보여주는 변화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순수함이 관습에 물들게 되면 그 순수함은 더 이상 맑고 투명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지만 순수함이 가지고 있던 맹목적인 성격은 남아서 누구보다 관습에 충실하게 된다.’
과연 메이 월랜드가 사회의 관습을 받아들이고 주변 사람들처럼 변하는 것이 잘못된 결과일까? 내 대답은 ‘아니오’이다.
물론, 사회에 존재하는 기존 관습이나 규범 등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부류의 결과는 두 가지이다. 쓸쓸히 죽거나, 새로운 사회를 만들거나.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해도 그 안에서 새로운 관습이 생기게 된다. 즉, 관습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인간이 사회를 구성한 후부터 계속되어 온 논제이다. 메이가 당시 뉴욕 상류층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관습에 적응하고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잘 한 것이다.
작가는 메이 월랜드를 통해 상류층 사회에서 인정받는 순수함은 진정한 순수함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속해 있던 뉴욕 사교계는 순수함을 잃어버린 곳이었다. 그렇지만 순수함을 잃었다고 그것이 잘못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 역시 살아남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 선택한 것이 보수적인 사회의 관습이었던 것 뿐이다.
3. 순수의 시대로 돌아보는 우리의 시대
<순수의 시대>는 당시 미국 상류층 사교계의 보수적인 문화와 비합리적인 관습을 비판했다. <순수의 시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어떤 것이 보일까? 나는 엘렌과 메이를 통해 사회부적응자를 보았고, 뉴랜드 아처를 통해 우리 사회의 관습에 대해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보통 사람들을 발견했다.
현대 사회는 신종 범죄행각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2023년에는 서울에서 무차별 칼부림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경기도 성남에서는 백화점으로 차량을 돌진하여 수 십명의 사상자를 냈던 사건도 있었다. 이들은 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일까? 우리 사회 구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수 년간 쌓여온 문제들로 인한 것이다. 산재한 문제들 중 가장 가까운 시기에 발생한 것은 2010년대 우리 정부의 안일한 복지 정책과 국내 경제 관리로 인해 발생한 삼포 세대의 발생이다.
삼포(三抛) 세대는 2010년대 유행했던 신조어로,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말한다. 이 단어는 2011년 경향신문의 기획시리즈 <복지국가를 말한다> 특별 취재팀이 만든 신조어이다. 취재팀은 3포 세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안정한 일자리, 학자금 대출상환, 기약 없는 취업준비, 치솟은 집값 등 과도한 삶의 비용으로 인해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거나 기약없이 미루는 청년층’
연애, 결혼, 출산은 가족을 구성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단계이다. 2010년대 당시 한국의 정부가 운영했던 복지 정책은 현실성이 부족했다. 국민들은 냉혹한 사회 현실에 내던져졌고, 국가는 이들을 나몰라라했다.
삼포세대가 가장 많이 발생했던 연령대는 20대와 30대였다. 빚까지 내가며 대학교를 어렵게 졸업했지만 졸업 후 그들이 가진 일자리는 비정규직뿐이었다. 비정규직의 월급으로는 매달 대출상환금을 내기도 빠듯했다. 경향신문의 당시 기획시리즈 기사에 따르면, 학자금 대출 2,800만원을 6년째 갚고 있는 비정규직 여성에겐 여전히 700만원이라는 빚이 남아있었다. 대학교를 다닐 적에도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다가올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학교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2011년 당시 학자금 대출을 받은 이들은 총 112만 8,341명에 달했다. 그 중 2만 5,366명이 제때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여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신용불량자가 되면 정규직으로 채용될 가능성이 극히 낮아진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 자리로 내몰린다. 비정규직의 한 달 급여로는 앞서 살펴본 여성처럼 학자금 대출만 갚기에도 버겁다.
많은 청년들이 대학 시절부터 금전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당장의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수업 시간이 아니면 일을 하러 다녔다. 그들에게 연애는 먼 이야기였다. 연애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사치가 되었다. 연애의 감정이 금전적인 문제로 포기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대학 시절을 마무리하고 직장을 가진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많은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 결혼을 하게 된 후 감당해야 할 추가 대출, 그리고 자신의 급여 상승률보다 높은 물가 상승율 등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2010년대 삼포 세대 중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사람들은 이전 부모 세대들과 달랐다. 그들이 젊은 시절 경험했던 금전적 어려움을 자신의 자녀에게 대물림해주기 싫었다. 자녀들에겐 풍족한 삶을 살 수 있게 최대한 지원했다. 자녀들은 어릴 적부터 자신이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제공받았다. 덕분에 이들은 금전적 어려움,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 등을 거의 경험해보지 못했다.
손쉽게 원하는 것을 얻으며 자란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면서 뒤늦게 실패를 경험한다. 사회는 원하는 것을 즉시 충족시켜주는 곳이 아니었다.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시간을 들여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사회가 원하는 변화를 잘 이뤄낸 이들은 잘 적응해서 살게 되었다. 반면 그러지 못한 이들은 부적응자가 되었다. 이들은 청소년 성범죄 등과 같은 소년 범죄부터 ‘묻지마 살인’과 같은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지나가고 있는데 어깨를 쳤다.”, “국가가 내게 해준 것이 없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지는 모른 채 남 탓을 한다.
사회 부적응자가 되었다고 해도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올바른 교육을 통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잠재력을 드러내줘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 성공할 때까지 기회를 제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실패를 용인하는 사회’이다. 기회를 어떻게 줄 것인지는 앞으로 고민해봐야 할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