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옥은 지옥과 달리 '속죄'라는 희망이 존재한다.
그러자 그 분은 말하셨다. 「 이 산은,
아래의 시작 부분은 아주 험하지만
위로 오를수록 덜 험하도록 되어 있다.」
< 연옥편, 제 4곡 88~90 >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도움으로 루시퍼의 몸을 타고 지옥을 나와 연옥의 입구로 들어서게 된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갔던 지옥과 달리 연옥은 낮은 층에서 높은 층으로 올라가는 탑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연옥의 꼭대기에서는 선택받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천국의 문이 있었다. 연옥 또한 지옥처럼 형벌을 받고는 있지만 지옥과 달리 이 곳에 온 이들에게 ‘속죄’의 기회를 제공한다. 연옥은 총 7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층은 일곱 가지 대죄, 즉 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색욕을 하나씩 맡아 각 죄를 벌한 이들에게 형벌을 가했다.
단테 역시 연옥에 들어서면서 이마에 일곱 대죄를 뜻하는 P 일곱 개를 새기게 된다. 단테의 이마에 새겨진 일곱 개의 P는 단테가 각 층을 통과할 때마다 천사들이 나타나 하나씩 지워준다. 연옥의 층을 통과할 때마다 단테의 이마에 새겨진 P를 지워주는 행위를 통해 단테는 자신의 영혼이 점점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 마지막 층인 7층을 벗어나면서 단테는 영혼의 모든 부분이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 이마에 새겨진 일곱 개의 낙인을 지우고, 영혼을 정화하는 행위는 단테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은총 속에 사는 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먼저 나를 돕지 않으면, 하늘에서
들어주지 않는 기도가 무슨 소용 있겠는가?
< 연옥편, 제 4곡 133~135 >
연옥에 남아있는 이들에겐 ‘속죄’라는 희망이 존재했다. 연옥에 들어온 사람들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수준이 아니었고, ‘속죄’라는 정화의 과정을 통해 씻어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생전에 자신의 가족과 친인척 또는 동료들이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해주면 ‘속죄’해야하는 기간이 줄어드는 효과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곳에 머무르고 있던 죄인들은 단테를 만나 단테가 살아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는 연옥을 나가게 되면 꼭 자신의 지인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연옥에서도 지옥과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던 피해를 자신이 그대로 받는다. 교만의 죄를 지은 자들은 등에 바위를 짊어지고 산을 오른다. 질투의 죄를 지은 이들은 눈꺼풀이 철사로 꿰매진 채 벌을 받는다. 분노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를 준 이들은 짙은 연기 속에서 벌을 받는다. 나태의 죄를 지은 이들은 끊임없이 달려야하는 벌을 받고, 탐욕의 죄를 지은 이들은 땅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어야 하는 벌을 받는다. 탐식의 죄를 지은 자들은 모든 것을 잃고 비쩍 마른 모습으로 걸어가야 했고, 마지막 층인 색욕의 죄를 벌하는 곳에서 죄인들은 불의 장막을 걸어다니며 만나는 이들에게 서로의 죄를 각인시키는 형벌을 받고 있다.
연옥에서 다루는 죄들 중에는 지옥에서 다루고 있는 죄, 분노, 탐욕, 색욕과 같은 것들도 있었다. 아래층에서 높은 층으로 올라가는 순서가 죄의 무거움을 뜻하는 것이라 보면 연옥에서의 가장 무거운 죄는 색욕이었다. 지옥에서 다루지 않고 연옥에서만 다루고 있는 죄들은 교만, 질투, 나태와 같은 것들이 있다. 연옥에 있는 죄인들은 ‘속죄’를 통해 용서받고 천국으로 갈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일곱 가지 죄들은 그 정도에 따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걸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2. 우리에게는 연옥에서 주는 속죄의 기회가 있는가?
연옥편은 중세 유럽에 유행했던 전염병, 전쟁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연옥의 이야기는 억울하게 죽은 가족들이 천국에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했다. 하소연할 곳이라면 교회밖에 없던 중세 유럽인들에게 연옥의 이야기는 절실한 기도가 하소연이 아닌 희망을 품게 했다.
단테는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고 이탈리아 여러 지역을 방황하면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경험했을 것이다. 어쩌면 연옥편은 단테가 직접 보았던 억울한 죽음, 그리고 자신과 같이 누명을 쓰고 고향에서 추방당해야 했던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연옥편을 읽으면서 우리 세상은 얼마나 타인을 용서하고 있는가, 실수와 실패에 대해 얼마나 많은 재기의 기회를 주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나라는 아직 실패와 실수를 한 사람들에게 재기의 기회, 용서받을 기회를 많이 제공하지는 않는 것 같다. 달리 말하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실패와 실수에 엄격’하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실수를 하고, 도전하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과정을 겪는다. 실수하고 실패를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실패’를 겪었을 때 마치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충분히 개선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실수를 했다고, 한 번 실패를 했다고 자신이 해온 모든 것을 부정하기도 한다.
매년 수능시험 당일 극단적 선택을 하는 수험생들, 사업이 실패하여 삶을 끝내는 이들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일들이 심심찮게 발생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완벽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3. 힘든 시기일수록, 어려운 사회일 수록 실수와 실패는 당연한 것이 되어야 한다.
‘완벽주의’는 실수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완벽주의자들은 자신이 하는 일은 성과가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완벽해야 한다. 누구보다 높은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로 타인이 보기엔 가혹해보일 정도로 자신을 몰아세운다. 만약 완벽주의자가 실수 또는 실패를 한다면 그런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사실만으로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질책한다. 이런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 자살로 이어지게 된다.
실수와 실패를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그 부작용으로 한탕주의가 생기기도 했다. 즉, ‘한 번에 제대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잘못 발전되면 ‘한방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도박이다. 일터에서 번 돈을 착실히 모아서 성공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제대로 성공하겠다는 생각에 도박이라는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를 뉴스, 신문 등을 통해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도박에 빠진 이들은 자신의 인생을 망칠 뿐 아니라 가족, 친인척들의 인생에도 피해를 줄 수 있다.
우리들은 우리 사회를 극한 경쟁사회라고 한다. ‘헬조선’과 같은 말로 비하하기도 한다. 내 생각에 중세 유럽의 사회 역시 극한 경쟁 속에 생존해야하는 사회였던 것 같다. 중세 시대 유럽엔 전염병이 만연했고, 크고 작은 전쟁이 거의 매일 일어났다. 힘없는 이들은 가차없이 재산을 빼앗기고 노예가 되었고, 남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여성, 아이들은 성적 노리개가 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한 사회가 중세 시대였다. 중세 유럽의 다른 표현이 ‘Dark Age’인 것을 보면 그 시대가 얼마나 암울하고 힘든 시기였는 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단테는 ‘신곡’의 연옥편을 통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쉴 수 있는 곳,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 속죄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려 했다.
연옥은 실수와 실패를 용납하고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용서한다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그 무엇보다도 잘 표현한 공간이었다. 현대 우리 사회도 이처럼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 억울하게 피해를 받은 이들이 용서를 빌고, 마음의 안식처로 삼을 수 있는 공간과 여지를 남겨줘야 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