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문장에 깃든 설국의 모든 것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雪國)이었다.”
밤이 흰 눈으로 희미해지고, 기차는 작은 신호소 앞에 멈춰 선다. 맞은편 좌석의 여인이 다가와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찰나―찬 공기, 눈송이, 그리고 낯선 설경이 독자의 시야를 파고든다. 『설국』을 다 읽고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와 이 문장을 열댓 번쯤 곱씹다 보면, 긴 터널 사이로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눈의 나라’로 이송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일본 문학계가 ‘명문장’이라 부르는 이유도 그 압축성 때문이다. 불과 한 줄로 “현실 → 경계 → 환상”을 뛰어넘는 장면 전환, 독자 각자의 머릿속에서 무한히 확장되는 잔상―결국 첫 문장은 작품 전체의 미학을 미리 보여주는 거울이다. 지금도 일본 드라마, 만화, 광고에서 끊임없이 패러디‧오마주되는 이유는, 이 한 줄이 ‘설국=차분함+신비로움’이라는 공식을 대중의 뇌리에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2. ‘그곳’은 어디인가 ― 지도 위에 찍은 설국 좌표
첫 문장을 음미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실제 설국은 어디일까?”라는 궁금증이 따라온다. 작품의 배경은 니가타 현, 그중에서도 군마 현과 니가타 현을 잇는 ‘시미즈 터널’과 작은 신호소 ‘츠치타루 역’ 일대다. 사진으로 본 츠치타루 역은 정말이지 소박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하다.
조촐한 간이역, 주변을 빙 둘러싼 산맥, 겨울이면 허리까지 쌓이는 적설량. 가와바타가 이 장소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한 풍경 취향이 아니다. 메이지 시대 이전 일본에는 ‘쿠니(國)’라는 중간 행정구역이 있었는데, 군마(옛 코즈케 국)와 니가타(옛 에치고 국)의 경계를 ‘조에츠 국경’이라 불렀다. 즉 ‘국경의 터널’이라는 표현은 실제 지리적 사실이자, 문학적으로는 “문명과 고립, 도시와 설원의 이중 경계”를 의미한다. 독자는 시마무라와 함께 터널을 건너며 도시의 시간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규칙이 지배하는 설국의 시간으로 진입한다.
3. 시마무라와 고마코 ― 거리로 유지되는 관계의 역학
설국에는 세 인물이 등장한다. 무위도식의 도시 남자 시마무라, 눈처럼 밝고 단단한 게이샤 고마코, 그리고 애수 어린 목소리를 지닌 요코. 줄거리는 단순하다: 시마무라는 온천 여관에서 고마코를 만난다 → 도쿄로 돌아갔다가 다시 찾아온다 → 정식 게이샤가 된 고마코와 감정을 주고받는다 → 그러나 끝내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표면만 보면 ‘손님과 게이샤의 엇갈린 연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와바타는 그 밋밋한 서사에 ‘거리’라는 치밀한 장치를 심어놓았다.
- 나이와 신분의 거리: 시마무라는 유산으로 사는 중산층, 고마코·요코는 생계를 위해 몸을 던져야 하는 여성들.
- 도시와 설국의 거리: 시마무라는 언제든 돌아갈 도시가 있지만, 두 여성의 터전은 눈으로 고립된 마을뿐이다.
- 애정과 책임의 거리: 시마무라는 관조·관광·관능 세 겹의 시선을 드리우지만, 책임질 마음은 애초에 없다.
고마코가 술에 취해 시마무라의 방으로 스며드는 장면들조차, 작가는 욕망의 직접 묘사를 철저히 피한다. 대신 하녀의 “약혼설” 한마디로 두 사람 사이에 투명한 벽을 세운다. 애정을 표현하려는 고마코와, 벽 밖에서 감상만 하는 시마무라―이 비대칭은 소설 내내 반복된다. 독자 역시 그 벽 바깥에서, 차가운 눈기운을 맞으며 두 사람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4. 비극의 파동 ― 유키오의 죽음과 창고의 화재
잔잔하기만 할 것 같은 설국에도 파문이 두 번 일어난다. 첫 번째는 유키오의 죽음. 고마코가 정성껏 간호했으나 결국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어린 청년. 그의 장례를 뒤로한 채 시마무라를 배웅하는 고마코의 뒷모습에는, ‘소멸을 받아들이는 체념’이 서린다.
두 번째는 누에고치 창고 화재. 영화 상영 도중 일어난 불길, 허공에 떠오르는 요코의 육체, 그리고 그 위를 관통하는 은하수의 빛. 시마무라는 현장의 아수라를 보면서도 동시에 하늘을 바라본다. 그때 그는 설국이라는 환상을 깨닫고, 도시로 돌아갈 결심을 굳힌다. 화재는 현실의 파열, 은하수는 여전히 환상의 끈―결국 가와바타는 비극적 장면에조차 ‘아름다움’이라는 필터를 씌운다.
5. 아름다움인가, 냉혹함인가 ― 가와바타식 미학의 빛과 그림자
『설국』의 위대함은 ‘잔잔한 아름다움’에 있다지만, 그 아름다움은 때로 잔혹하다. 고마코와 요코의 삶·죽음·애증 모두가 “차분한 설경” 안에서 미화된다. 독자는 감탄하면서도 불편하다. 왜 모든 것은 이렇게까지 거리 두기 속에서만 존재해야 할까? 가와바타가 노벨 강연에서 말한 “아름다운 일본의 나”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설국』을 탐미주의의 극치로 예찬하고, 또 다른 이들은 감정 착취의 서사로 비판한다. 두 평가 모두 옳다. 그 모순을 의식적으로 품고 있는 소설이기에, 9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독자의 마음을 갈라놓는다.
6. 나의 질문, 우리의 감상
첫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무언가 알 수 없지만 대단한 세계”는, 재독을 통해 “아름다움과 잔혹함을 동시에 들여다보라는 초대장”으로 바뀌었다. 설국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은유다. 눈처럼 순백이지만, 눈 속에 갇히면 생존이 위태롭다. 시마무라는 그 이중성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난다. 독자는 어떤가? 우리는 고마코와 요코의 운명 앞에서, 혹은 지구 반대편 설경 속에서, 어떤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을까.